시대의 변화 일본 역사에서 강한 중앙집권이 지속된 시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를 제외하면 약 250~300년가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일본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정비된 야마토 정권 아래, 중앙의 관영 공방에서 육성되어 온 주조업은 중세에 접어들며 점차 민간 영역으로 이동하기…
시대의 변화 일본 역사에서 강한 중앙집권이 지속된 시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를 제외하면 약 250~300년가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일본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정비된 야마토 정권 아래, 중앙의 관영 공방에서 육성되어 온 주조업은 중세에 접어들며 점차 민간 영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곧 중앙집권적 권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일본은 권력의 중심이 흔들리고, 무사 출신의 유력 가문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본격적인 권력 다툼이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당시 유력 가문이었던 타이라와 미나모토의 대립이 극에 달하면서 겐페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나모토 가문의 유력자였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승리하면서,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자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세에 접어들게 됩니다. 무사 정권의 치하에서 일본은 봉건제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지역의 관리였던 슈고는 점차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고, 이후 쇼군과 다이묘(지방 영주)로 이어지는 권력 체계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주요 산업들은 점차 지방에서 성장한 영주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민간 양조업은 여전히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대 율령제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기존의 지방 관청, 장원, 신사와 사원처럼 오래전부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이라노 기요모리가 주도한 일본과 송나라 간의 무역을 통해 송나라의 화폐가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화폐경제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각종 수공업 생산품뿐만 아니라 술 역시 사고파는 상품으로 본격적으로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분랴쿠 원년, 1234년 무렵에는 가라스마 서쪽, 아부라노코지 동쪽, 시치조보몬 남쪽, 하치조보몬 북쪽 부근, 즉 오늘날의 교토역 북쪽과 히가시혼간지, 교토 타워 일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집니다. “도소는 수를 알 수 없고, 상인이 가득하며, 해내의 재화가 오직 그곳에 있다.” 이처럼 번영한 교토 일대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술도가(양조장)가 들어섰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발전은 교토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도다이지와 같은 거대한 지역 사찰 주변부터 기이, 즉 오늘날 와카야마의 외진 마을에 이르기까지 술도가가 들어섰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1252년 막부가 가마쿠라 일대의 술항아리를 조사했을 때, 그 수가 37,274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막부는 한 집에 한 개의 술항아리만 허가했으며, 고주(沽酒, 술 판매)를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허가를 어긴 항아리는 찾아내어 부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무사 정권이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금지하고, 근검과 예절의 엄수를 법제화했기 때문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과도한 음주 문화의 확산이 무사 권력의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인식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뜻밖의 사실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양조산업을 직접적인 과세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민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술에 대한 최초의 과세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납니다. 쇼와(1312~1316), 겐코(1321~1323), 겐무(1334~1335) 연간에 걸쳐 신사의 유지·보수 및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모강 동쪽에 위치한 술도가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기적인 세금이라기보다는 임시적인 부담금에 가까웠습니다. 양조장에 대한 세금이 금융 경제의 한 재원으로 징수되기 시작한 것은 조지 연간, 즉 1362~1367년 무렵입니다. 이는 대외기, 곧 조주정이었던 나카하라 모로쓰라의 요구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장 남북조 시대에 접어들며, 고엔유 천황(북조 천황)의 즉위에 즈음하여 아시카가 막부, 즉 무로마치 막부는 여러 나라에 단전(토지 면적에 따라 부과한 임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동시에 도소로부터는 한 집마다 30관문을, 술도가, 즉 주조업자로부터는 술항아리 하나에 100문씩을 ‘차용’이라는 명목으로 징수하게 됩니다. 이후 메이토쿠 4년, 1393년에 도소와 술도가에 대한 과세 규정이 「낙중 주변에 산재한 도소 및 술도가 역 조항」으로 명문화되면서, 술도가에 대한 과세는 본격적인 제도적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술도가세는 술도가 한 집마다 균등하게 부과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항아리라는 술의 용기를 기준으로, 다시 말해 양조 규모에 따라 부과되었습니다. 이는 술도가들 사이에 이미 상당한 규모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 점에서 술항아리 수를 기준으로 한 주호역(술 제조 집단에 부과한 부담금)은 당시 실태에 맞춘 비교적 합리적인 과세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조산업의 규모는 본격적으로 성장했고, 막부가 걷는 세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교토 일대를 중심으로 다수의 양조장이 들어서면서, 당대의 양조 기술 또한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양조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고품질의 명주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술값은 본래 값으로, 묵은 술은 백 문마다 다섯 작씩, 새 술은 백 문마다 여섯 작, 길분은 다음으로 일곱 작, 야나기의 값은 묵은 술이 백 문마다 세 작, 새 술이 백 문마다 네 작.” 이는 동전 백 문으로 살 수 있는 야나기 술의 숙성 술이 겨우 술잔 세 잔 정도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만큼 야나기 술은 당시 최고급품으로 취급되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야나기는 지역이 아닌 술도가를 의미) 이처럼 교토를 중심으로 중세 양조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토가 술을 빚는 데 필요한 쌀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교토는 본래 장원 영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러 지방에서 거둔 연공미(곡식으로 걷은 세금의 일종)가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고메바”라고 불린 교토의 쌀시장은 산조 무로마치와 시치조 부근에 있었고, 마차꾼이 운반해 온 북국미와 요도·후시미·도바 등에서 실려 온 서국미가 모두 이곳에서 거래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전해집니다. 술을 빚는 데 쌀만큼 중요한 것은 술누룩이었습니다. 당시 술누룩의 제조와 판매에 대한 특권은 기타노 신사에 속한 좌중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좌중이란 일종의 동업 조합을 뜻합니다. 이들이 누룩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면서, 좌중에 속하지 못한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의 대립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통해 중세 일본에는 이미 양조산업과 관련된 이권 단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이러한 대립 속에서 술도가들이 몰래 직접 술누룩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고, 결국에는 각 양조장이 개별적으로 술누룩을 빚는 일이 점차 일반화되었습니다.